호치민
조국과 인민을 무한히 사랑한 사람
‘우리 산은 영원하고, 우리 강도 영원하고, 우리 인민도 영원하리. 미국 침략자가 물러가고 나면, 우리는 열 배 더 아름답게 이 땅을 다시 세우리라’
‘혁명적 도덕을 제대로 이해하고, 근면, 검약, 성실, 청렴, 공익의 가치에 절대 헌신하는 자세, 그리고 이타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일생 동안 저는 몸과 마음을 다해 조국과 혁명, 그리고 인민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만약 지금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더 오랫동안, 더 많이 봉사할 수 없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어떤 후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가 떠난 후, 인민들이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대규모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날 세계의 지도자 중에서 실제로 호치민처럼 창조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만들어내는 것을 지키는 수호자이며, 근원임과 동시에 방향을 가리키며, 사상임과 동시에 실천이며, 국가임과 동시에 혁명이며, 고난의 행자임과 동시에 정치지도자이고, 사람좋은 아저씨임과 동시에 전쟁지도자인 인물은 한 명도 없다“. <호치민 전기 저자 쟝 라쿠튀르>
호치민(1890~1969)은 식민지로 피폐한 약소국 베트남을 이끌고 세계 최강대국인 나라를 그것도 한나라가 아닌 무려 세나라 - 프랑스, 일본, 미국-를 상대하려 조국에게 평화와 해방 그리고 평등과 번영을 만들어 냈다. 30여 년 동안 베트남 민족운동의 최고 사령관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가장 영향력 있는 공산주의 지도자로 꼽힌다. 그는 베트남 현대사는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탁월한 정치적 지도력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낸 인물이다.
독서와 여행을 통해 세상을 배우다.
호치민은 1890년 5월19일 북부의 예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 이름은 우옌씬꿍이었다. 그가 10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가족을 돌보지 못하고 방황하게된다. 그는 유년시절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했으나 이런 단점은 오히려 엄청난 독서와 끊임없이 국내, 국제적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자주적으로 자신을 수련하고 능력을 배가할 수 있었다. 호치민은 당시의 수도인 위에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4년을 지내면서 그는 프랑스외인부대 출신인 로지우 교장에게 많은 시달림을 당했다. 로지우 교장은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에게 포로로 잡혀 혼이 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교장은 지저분한 베트남 아이들을 휘하에 거느리게 된 것을 자신의 원한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간주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호치민은 더욱 더 적극적으로 독립투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기에 프랑스 군대를 몰아내려는 식민지 민중의 봉기가 계속됐다.
혁명가로 성장
호치민 후에의 꾸옥혹대학에 입학했다가 1911년 사이공의 직업전문학교의 선원양성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애국심에 가득차고 혈기왕성한 21살의 청년이 아편과 알코올, 감옥뿐인 식민지 현실에 순응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졸업 후 시골 국민학교 교사생활 10개월만에 그는 종적을 감추고 프랑스 소속의 함선에 견습조리사로 들어가서 노예 같은 생활 속에서도 2년 동안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각국을 돌며 국제감각을 키우고 완벽하게 영어, 프랑스어 외에 중국 광동어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해 겨울 프랑스 상선 라투슈 트레비유에 몸을 실은 호치민은 20대의 절반 이상을 프랑스와 미국, 영국을 왕래하며 세상을 경험한 뒤 1917년 연말 파리에 정착한다.
호치민에게 1923년까지의 파리 생활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좌익 지도자와 접촉하며 단순한 애국적 반역자에서 근대적인 혁명지도자로 탈바꿈한다. 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고, 국제식민지연합의 기관지 <르 파리아>를 창간한다. 특히, 1919년 1월 1차 대전 처리문제를 다룬 베르사이유 강화회의 때는 미국 윌슨 대통령 앞으로 정치범의 석방과 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요구하는 `조국해방을 위한 8항목'을 제출했다. 이 요구서는 윌슨에게까지 전달되지 못했지만, 깡마르고 왜소한 체격의 젊은 혁명가를 널리 알리는 데는 크게 기여했다. 1924년 한 해 동안 모스크바에 체류하며 부하린, 지노비예프, 스탈린, 이입삼 등의 국제 공산주의 지도자와 교류한 호치민은 국내의 좌익조직을 결집해 30년 홍콩에서 `베트남공산당'을 결성한다. 공산당 결성과 함께 제시된 10대 강령에는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던 베트남의 해방의 대 원칙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국에서의 무장투쟁
호치민의 삶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그 전반부는 그가 베트남의 바깥에서 혁명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시기고, 후반부는 고국에 발을 디디고 무장투쟁을 지도하는 때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호치민은 1941년, 30년 만에 고국 땅을 밟고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주체로 한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해 주석의 자리에 오른다. 베트민은 “조국의 인민을 해방시키고,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재산과 연령·성별·종교·정치적 의견 등에 관계없이 일체의 애국자를 결집한다”고 선언했다. 호치민과 베트민, 베트남 해방을 위한 이 두개의 톱니바퀴가 고난의 유아기를 벗어나, 광범위한 연합전선에 기초한 국내 투쟁의 깃발을 치켜든 것이다. 베트민의 결성을 계기로 코민테른의 국제주의에 밀려나 있던 민족주의가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끄우꾸옥”(救國)이라는 구호가 제창됐다. 혁명의 주체도 베트남의 실정에 걸맞게 프롤레타리아보다는 농민에게 중점이 두어졌다. 그의 이름이 호치민으로 바뀐 것은 이 무렵이다. 1945년 3월 일본이 프랑스를 공격하면서 인도차이나의 정세는 역동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해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호치민은 일제봉기를 명령하고 8월19일 하노이를 손에 넣는다. 9월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그는 정부 주석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중국과 거래 끝에 다시 베트남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해방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새로운 투쟁이 호치민의 어깨에 지워졌다. 그러나 이번에 선택한 무기는 총이 아니라 협상이었다. 1946년 3월 그는 베트남을 완전 독립이 아닌 프랑스 연합, 인도차이나 연합의 일부로 남아있도록 프랑스와 타협했다. 협상 후 프랑스도 방문했다. 당연히 타협적 온건주의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인민들 앞에 나가 “싸움보다도 교섭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5년 만 지나면 교섭에 의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데, 지금 어떻게 5만이나 10만 사람 목숨을 희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호치민은 결코 무분별한 전쟁 지상주의자가 아니었다. 무력투쟁과 외교교섭을 적절히 섞어 장기적인 이익을 취하는 것이 그의 일관된 전략이었고 타는 듯한 눈매와 꿰뚫는 듯한 목소리, 신념에 찬 몸짓과 명확한 전망 그리고 불가사의한 친근함은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사로잡는 가장 뛰어난 무기였다. 그러나 프랑스와 하노이의 불완전한 동거는 이내 깨졌다. 46년 11월 프랑스군은 하이퐁의 베트남인 거주 지역을 포격해 6천명을 살해했고, 호치민은 대불항전을 지령한다. 30년이 지나서야 끝을 맺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베트남전쟁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프랑스와의 전쟁의 고비는 53년의 디엔비엔푸 전투였다. 호치민의 가장 충실한 동지이자 또 하나의 영웅인 보 위엔 지압이 이끄는 부대는 디엔비엔푸 프랑스군 요새 주변의 지하로 4백㎞에 이르는 참호와 갱도를 뚫어 요새를 함락시켰다. 북위 17도선을 잠정 경계선으로 베트남을 남, 북으로 분할하는 제네바협정이 체결됐다. 프랑스군은 물러갔지만 `세계질서의 수호자' 미국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45년부터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한 미국은 55년 고 딘 디엠이 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본격적으로 베트남을 지원했다. 호치민은 프랑스와 싸우고 있던 51년 “오늘, 코끼리와 힘 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은 메뚜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일, 코끼리는 내장이 빠지고 말 것이다”라는 전투적인 속담을 사용했다. 이제 코끼리가 아니라 공룡과 싸움을 시작해야만 했다.
미국과의 전면전
드디어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미국은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베트남의 통킹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 구축함을 폭파시키고, '베트남군의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고 사건을 조작했다. 이 같은 사실은 미 국방성 비밀문서(The Pentagon Papers)에서 '34알파작전계획'에 의해 북폭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세밀한 상황조작을 추진하여 미군이 폭격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다. 통킹만 사건을 시작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군 측 군대는 100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베트남 전역을 쉴 사이 없이 폭격해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쏟아 부은 폭탄의 양은 900만 톤으로 이는 2차 대전 당시 태평양전쟁에서 사용한 전체 폭탄의 양보다 많았다. 전쟁은 베트남의 국경을 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됐다.(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그러나 호치민이 이끈 베트남군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살육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20년, 혹은 100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끝내 이길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호치민의 군대는 소련이 지원한 전쟁 무기와 전 국민의 지지 기반으로 미군을 쉴 사이 없이 괴롭혔다. 프랑스 군대와 싸울 때 발휘했던 게릴라 전술은 더욱 빛났다. 호치민의 군대의 무서운 점은 포용력이었다. 이미 거의 모든 베트남인들을 지지자로 만든 호치민은 미군 측에 붙어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동포마저도 포용했다. 호치민의 해방전선은 자신들의 포로가 된 이들까지 용서하고 설득해 결국엔 남베트남군이 미군의 등에 총을 쏘게 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참으로 놀라운 지도력이었다.
50만 미군은 5만 한국군과 뉴질랜드, 호주 군대에다 50만 남베트남 괴뢰군까지 거느리고 북베트남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B52 폭격기로 북 베트남에 융단폭격을 가하여 하노이 정부가 휴전기간 동안 피땀 흘려 건설한 보잘것 없는 공업시설마저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하노이를 비롯한 하이퐁, 남딘 등 북 베트남 경제 중심지는 '석기시대'로 돌아갔으며, 민간시설과 학교, 교회, 병원까지도 빠짐없이 공습을 당했다. 미군 비행기는 민간인에게 특히 큰 피해를 입히는 네이팜탄을 대량 투하했으며, 게릴라 근거지를 말살하기 위해 살포한 7600만톤의 고엽제와 1760만 갤런의 제초제 때문에 울창한 밀림이 황무지로 변했다. 또한 최루가스탄을 사용하여 부락을 폐허로 만들고 핵심적인 게릴라 지역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전 세계는 숨을 죽이고 이 전쟁을 지켜보았다.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위력을 과시했고, 그 이후 발전을 거듭한 최신형 무기를 가진 세계 최강의 군대가 인구 3천만의 약소 민족을 목 졸라 죽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미국의 승리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미 백년씩이나 제국주의 군대를 맞아 고난에 찬 투쟁을 전개해 온 베트남 민중은 자기 땅에서 벌이는 저항전쟁을 필승으로 이끌 원칙과 방법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치민의 해방전선은 이겨냈다. 그들은 세 종류의 군대(민병과 게릴라, 지방군, 정규군)와 세 개의 돌팔매(무장투쟁과 정치투쟁, 적군설득공작)로 미국을 쓰러뜨렸다.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도 폐품이 돼버렸다. 미국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엄청난 비용을 퍼붓고 첨단무기를 들여왔지만 나날이 성장하는 해방전선의 힘을 제압하지 못했다. 미군은 극도로 적대적인 베트남 민간인과 게릴라에게 24시간 포위되어 있었다. 식수조차 필리핀에서 실어 와야 했으며, 베트남인의 손을 통해 들어온 음식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라고는 통조림뿐이었다. 1968년부터 미국 병사들은 자신들의 상관을 다수 살해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1971년이 되면 대다수 사병이 교전을 거부하거나 회피했다. 반면 해방전선은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순식간에 복구해 냈다. 수백만의 농민과 노동자, 청년 학생과 지식인, 불교도와 산악 소수민족이 모두 자기편이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마침내 닉슨은 1970년 "미국의 국력에도 한계가 있다"고 선언하여 전통적인 정치, 군사 간섭정책에서 한 걸음 물러설 뜻을 비추었다. 그는 전후 30여 년간 고집해 온 냉전체제를 일부 포기하고 데탕트(평화 공존)를 추구하여 1972년 중국과 소련을 방문했다. 그리고 1973년 2월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거인은 만신창이가 되어 보잘 것 없고 낙후한 약소민족과 협정을 맺고 30년 가까이 욕심을 불태웠던 파란 많은 땅에서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다. 1975년, 생전에 호치민이 이끌던 군대는 사이공을 점령하고 괴뢰정부 남베트남을 궤멸시켰다. 이로써 완전한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쟁취했다. 4월 30일은 베트남 민중들에게 30년을 끌어왔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며, 남부 베트남이 해방된 날이며, 분단됐던 조국이 마침내 하나로 통일된 역사적인 날이다. 베트남 민중이 프랑스, 일본, 미국 군대와 싸워 독립과 통일을 이루는 데는 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세계 현대사에서 이렇게 셋이나 되는 제국주의 나라와 싸운 예는 달리 없다. 스스로 자기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하는 것은 어느 민족이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인데도 베트남 민중은 이 당연한 권리를 찾기 위해 말 못할 고초와 희생을 치러야 했다. 베트남 민중은 '자기 땅에서 벌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무기보다 강한 신념이 제국주의를 물리치는 순간, 세계는 베트남에 환호와 영광을 보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으로 양심적이고 평화애호적인 세계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 전쟁은 유럽의 68혁명에, 미국과 일본의 반전운동에, 남미의 변혁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호치민이란 이름보다 호 아저씨로 불린
그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그의 지도력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 인민들이 보내는 그의 인격에 대한 신뢰였다. 오랜 투쟁 경력뿐만 아니라 호치민 자신의 보여주는 절제된 권력에 크게 힘입고 있었다. 역사상 많은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급속히 타락하는 "권력의 부패"가 만연하였으나 그는 드물게 권력의 부패에 빠져들지 않했다.
1969년 79세의 나이로 베트남 인민의 영웅 호치민은 사망했다. 1969년 9월 2일 오전 9시 47분, 자신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던 바로 그날, 정확히 24년 뒤의 그 아침을 맞이하고서야 그의 심장이 멎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호치민은 단 10분, 아니 5분만이라도 인민들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시체 때문에 한 뼘의 농지도 낭비할 수 없다며, 화장시켜 작은 단지 안에 담아달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의 영웅 호치민을 방부 처리해 영원히 전시 보관하고 있다. 그것이 인민의 마음인 것이다. 그는 죽으면서 지팡이 하나와 옷 두벌,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비롯한 몇권의 책이 유품의 전부였다.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 다른 소지품은 못 챙겨도 지도자와 관리들의 청빈한 공직윤리와 국민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 <목민심서>는 꼭 챙겼을 정도로 그는 이 책을 아꼈고, 다산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다. 덕분에 목민심서는 베트남 공무원들의 지침서로 채택되기도 했다. 프랑스와 세계 최강국 미국을 연이어 격퇴시킨 혁명가이자 불멸의 용사 호치민. 베트남군의 수장이자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으면서도 그는 이처럼 평생 스스로를 낮추고 검소한 민중의 삶을 살았다. 또한 그의 소박함과 친근함은 그가 인민들의 '호 아저씨'로 머물 수 있게 만든 지도력의 원천이었다. 그의 성실한 지도력은 많은 사람들, 특히 베트남 인민 자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토록 강인한 지도자임에도 그의 모습은 언제나 따뜻하고 인자했고, 그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노구를 이끌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병사들과 함께 모래주머니를 나르던 호치민. 그의 품에 안긴 어느 소녀가 그의 수염을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는 데도 그저 웃고만 있던 할아버지. 온몸으로 외세에 저항한 혁명가이면서도 베트남 어린이와 농민들로부터 이웃집의 '호 아저씨'로 불렸던 호치민. 그래서 베트남 인민들은 여전히 그의 후덕한 모습을 추억하며 37년이 지난 오늘 이 순간까지도 그를 '박호'(Bac Ho : 호아저씨)라고 부른다. 낡은 외투에 달아 빠진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기꺼이 '인민의 벗'이 되어주던 그를 그리워하며.
연보
1859년 프랑스군 사이공, 지아딘 및 미토 점령
1867년 프랑스군 남부 코친 차이나 전지역 점령
1890년 5월 19일 반프랑스 저항의 핵심인 응에 안 성의 킴리엔 마을에서 은우엔 신 쿵(호치민) 출생
1901년 어머니 호앙 티 로안 세상 떠남
1907년 수도인 후에의 프랑스 국립학교인 국학에 합격
1908년 조세 반대시위에 가담하여 국학에서 퇴학 당함
1911년 6월 사이공에서 프랑스 기선 아미랄 라투세-트레빌 호에 주방보조로 취직되어 베트남을 떠남. 그후 약 2년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을 돌아다님. 이 시기에 훗날 호치민의 혁명적 삶의 초석이 놓이게 됨
1912년 미국에 머물면서 노동자로, 하인으로 일하고, 흑인 활동 조직에 참여하기도 함
1914년 영국 런던에서 청소부, 보일러 관리직, 요리사 보조로 일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에 관여하여 ‘혁명노동자연합’에 가입
1919년 안남애국자연합 결성하고 온건한 8개조의 청원서인 ‘안남 민족의 요구’를 응우엔 아이쿠옥(애국자)이란 가명으로 발표. 고정적인 일자리인 사진 수정사로 취직. 6월 프랑스사회당원으로 가입. 위마니테. 등 파리의 간행물에 기고하기 시작
1920년 제 3인터내셔널 협력위원회’위원이 됨. 12월 투르대회 열려 프랑스 공산당 창당되고 코민테른 가입 결정
1921년 국제식민지연맹(식민지 민족들의 독립 투쟁을 통일한 조직) 결성
1922년 <르 파리아>를 창간하고 편집자인이자 중요한 기고자로 활동. 10월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공산당 전국대회에서 식민지 문제에 좀더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 제출
1924년 6월 제 5차 코민테른 대회에 프랑스공산당 대표로 참석하여 3차에 걸쳐 식민지 문제와 농민의 역할에 대해 열정적인 발언을 함. 11월 광저우에 도착
1925년 6월 광저우에서 새로운 혁명조직인 ‘베트남혁명청년회’ 결성. 잡지 <타인 니엔(청년)> 간행. 광저우에 세워진 ‘베트남 혁명을 위한 특별정치연구소’의 교사로 활동
1926년 베트남 혁명교과서인<혁명의 길/ 집필. <시험대에 오른 프랑스 식민주의>출간
1930년 안남공산당과 인도차이나공산당, 인도차이나공산주의연맹을 통합한 베트남공산당 창당(후에 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개명).
1931년 상임위원회 대부분이 치안국에 체포당함. 6월 호치민도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 체포됨
1938년 9월 중국으로 떠남. 중아시아를 거쳐 시안을 거쳐 옌안, 구이린으로. 팔로군 지역본부에서 기자 일을 하면서 보건 담당 간부로 일함
1940년 쿤밍에서 팜반 동과 보 응우엔 지압 만남. 독일의 프랑스 점령으로 베트남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됨. 베트남전선 만들어짐. 호치민이란 새로운 이름 사용하기 시작
1941년 베트민 사령부를 구이린에서 장시로 옮김. 곽 보의 동굴에서 생활. 5월 인도차이나공산당 제 8차 전체회의 개최. 호치민이 의장을 맡은 첫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베트남 독립을 가장 앞에 놓음.
1942년 8월 중국으로 가는 길에 중국 경찰에게 체포당함. 감옥 안에서 <<옥중일기>> 집필
1943년 9월 석방됨
1944년 3월 동맹회의 대표회의가 류저우에서 열림. 중국국민당 장 파쿠이의 도움으로 중국남부에 혁명운동기지 만듦. 12월 무장선전대의 첫 부대 창설. 베트남해방군의 형태가 잡혀감
1945년 3월 일본이 비시 행정부를 무너뜨리고 베트남 황제인 바오 다이 치하의 꼭두각시 정부 세움. 3월 미국 연락장교 찰스 펜과 만나 미국 쪽 정보원 일을 맡음. 5월 새로운 루트를 따라 호치민이 내려와 킴룽에 새로운 군사 사령부 조직. 8월 13일 제 9차 전체회의에서 총봉기 결정. 8월 16일 일본 항복 소식에 전국이민대회 소집. 새 국기와 국가 결정. 총봉기 일어남. 8월 19일 타이 응우옌 성도에 진입. 하노이도 베트민이 무혈 점령. 베트남 민주공화국 성립. 8월 22일 북부 대부분에서 권력 장악. 8월 29일 바오 다이 황제의 퇴임 요구. 8월 27일 민족해방위원회(새로운 임시정부
1946년 1월 1일 민족주의자와 베트민의 새로운 연립정부 구성. 1월 6일 북부에서 총선거 실시. 10월부터 프랑스판무관 장 생트니와 협상 시작. 결국 독립 대신 자치로 타협. 3월 2일 최초로 국회 소집. 호치민은 새로운 연립정부의 주석으로 선출됨. 3월 6일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에 합의문 만들어짐. ‘프랑스는 베트민주공화국을 프랑스 연합 내에서 자체의 정부, 의회ㅡ 군대, 재정을 둔 자유국가로 인정한다’. 3월 18일 프랑스군 진주 5월 31일 평화 회담을 위해 파리로 떠남. 7월 6일 퐁텐블로 평화회담 열림. 9월 10일 잠정 휴전협정 체결. 10월 18일 호치민 베트남에 도착. 10월 28일 국회 소집. 헌법 초안 승인. 코친차이나에 휴전협정. 11월 하이퐁에서 베트남과 프랑스군 충돌. 12월 17일 치안 기능을 넘기라는 프랑스측의 최후 통첩. 12월 19일 하노이에서 전쟁 발발. 12월 22일 3단계 전략 발표
1949년 베트남과 프랑스 양측은 프랑스 연합 내에서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인정한다는 협정에 서명.
1950년 1월 호치민 중국방문. 중국의 베트남공화국 인정. 1월 30일 소련도 인정. 소련과 중국의 지원 약속 받음. 중국 고문단 베트남에 도착하고, 군사 장비 제공, 중국 남부에 베트민 부대들을 위한 훈련소 생김. 1월말 제3차 전국대회 열려 2단계 사회주의 혁명선언. 9월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군 공격. 프랑스군 패퇴.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음. 12월 총공격 계획 세움
1951년 2월 미국의 바오 다이 정권 승인. 베트민 총공격에 프랑스는 네이팜탄으로 맞섬. 베트민은 큰 상처를 입고 산 속으로 철수. 2월 당 제2차 전국대회 열어 중국식 혁명 모델 채택선언. 베트민전선은 '베트남민족통일전'으로, '인도차이나공산당'은 '베트남노동당'으로 개명.
1952년 2월 호아 빈 점령. 52년 말에는 넓은 지역에서 해방 조직 재건
1955년 베트민전선의 뒤를 이었던 리엣 비엣 전선을 '조국전선'이라는 폭넓은 전선조직으로 바꿈(통일과 독립을 위한 민족적 연대).
1959년 1월 제 15차 전체회의에서 남부 통일을 최우선 순위에 놓음. 북에서 훈련받은 요원들을 남으로 침투시킴. 호치민 통로를 통해 북에서 남으로 병력. 무기. 물자 수송 준비. 1960녀경 남베트남에서 무장 저항이 급속히 번져나감. 12월 20일 '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수립하여 전투 시작. 베트콩이라 불림.
1963년 봄 불교도들의 폭동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일어남. 11월 케네디 정부의 암묵적인 승인을 받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응오딘 디엠 정권이 무너짐. 12월 베트남노동당 제 3차 대회 - 통일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 무장 투쟁을 공식적으로 인정
1965년 2월 미국의 적극적인 공격 시작됨. 평화 협상 제안은 실패.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소련과 중국의 지원 점점 커침. 1965년 말에는 미군이 20만명을 넘어섬. 북베트남 정규군 투입하여 본격적인 전쟁 벌어짐
1968년 1월 31일 텟공세 시작. 베트남인 3만 명 사망. 미국인 2천명 사망으로 미국에서 반전 여론 높아짐. 11월 파리에서 평화회담 시작됨.
1969년 9월 2일 9시 45분 베트남 독립 24돌을 기념하는 날 호치민 사망.
1972년 부활절 공세
1973년 마침내 타협에 이름. 협정의 주요 내용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휴전과 남은 미군 전투부대의 철수
1975년 마지막 공세로 4월 사이공 점령
자료
호치민 : 식민주의를 타도하라.(프레시안북). 지시채널 e 호치민 EBS 짧은 다큐
토론주제
‘비록 지금은 길고 험난하고 복잡해도, 우리의 정치투쟁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정당한 목표가 있고, 민족 전체가 한마음으로 단결해 있으며, 모든 동포가 용감하게 투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혁명가가 그렇듯이 호치민도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승리의 비결을 대중에서 찾았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미래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대중과 함께 하는 것이다.
1)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거나 감동적이었던 점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2) 베트남과 한반도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mbc 스페셜> 신년기획으로 리더십을 다루었고, 그 중 한 편이 호치민에 대한 겁니다.
47분짜리 영상인데 괜찮습니다. 참고하세요.